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는 피난을 많이 갔던 왕입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침략 때도 피난을 갔지만, 그 이전에 내전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이 됐는데, 반정의 주역 중 이괄(李适)이라는 군인이 있었습니다. 과감성과 결단력을 갖춘 무장이었죠. 그러나 이괄은 큰 공을 세우고도 논공행상에서 밀리고 평안도로 내쫓기게 됩니다. 여기에 반역의 무고까지 쓰고 아내와 아들이 죽게 됐습니다. 화끈한 성격의 이괄은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화들짝 놀란 인조는 충청도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 때 어떤 농부가 떡을 해서 바쳤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인조는 “절미(絶味)로구나,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떡을 만든 이의 성이 임 씨여서 ‘임절미’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그게 훗날 ‘인절미’가 됐다고 합니다.

 

임금은 아니지만 임금처럼 군림했던 이승만 대통령도 음식 작명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나간 원양어선이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경무대에 상납을 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물고기의 이름을 물었는데, 아무도 답을 못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정도 크기면 국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겠구나. 이게 진짜 물고기다”라면서 참 진(眞) 자를 써서 ‘진치’라고 이름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진치’라는 발음의 어감이 안 좋아 나중에 ‘참치’가 됐다고 합니다.

 

음식 작명에 관해서는 이 이야기도 빠질 수 없겠죠. ‘도루묵’이 주인공입니다.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간 선조에게 어느 날 어부가 물고기를 진상했습니다. 피난을 다니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던 선조는 그 물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물고기 이름이 뭐냐?”고 물었겠죠. “묵어입니다”라고 답했는데, 선조는 물고기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은어(恩魚)’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선조는 한양에 돌아온 뒤 그 맛이 그리워 수라에 은어를 올리게 했는데 맛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묵어’라고 불러라”라고 이름을 물렸고, 그래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들의 신빙성을 두고 말들이 많긴 합니다. 선조의 일화와 관련해서도 도루묵 자체가 동해에서 나는 물고기인데, 운송과 냉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에 황해 지방으로 피난을 갔던 선조가 도루묵을 먹을 수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도루묵의 일화를 적은 시가 있습니다.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살았던 이식이라는 선비의 ‘환목어(還目魚)’라는 시입니다.

 

有魚名曰目(유어명왈목)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海族題品卑(해족제품비)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라

膏腴不自潤(고유부자윤)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데다

形質本非奇(형질본비기)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終然風味淡(종연풍미담)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박하여

亦足佐冬釃(역족좌동시)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國君昔播越(국군석파월) 전에 임금님이 난리 피해 오시어서

艱荒此海陲(간황차해수)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目也適登盤(목야적등반) 목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와서

頓頓療晩飢(돈돈료만기)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드렸지.

勅賜銀魚號(칙사은어호)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永充壤奠儀(영충양전의)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金輿旣旋反(금여기선반) 난리 끝나 임금님이 서울로 돌아온 뒤

玉饌競珍脂(욕찬경진지)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嗟汝厠其間(차여측기간)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詎敢當一匙(거감당일시)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네.

削號還爲目(삭호환위목)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斯須忽如遺(사수홀여유)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賢愚不在己(현우부재기)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貴賤各乘時(귀천각승시)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名稱是外飾(명칭시외식)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委棄非汝疵(위기비여자)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이 아니라네.

洋洋碧海底(양양벽해저)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自適乃其宜(자적내기의)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도루묵 이야기에서 우리는 황해에 도루묵이 있었네 없었네를 따지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민심입니다. 의주로 피란을 갔던 선조는 왜군이 물러난 뒤 한양에 돌아왔지만 논공행상을 하면서 의주 피란길 자신을 보위했던 관료들에게는 큰 상을 내렸으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게릴라전을 펼친 의병장들은 외면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조의 그릇된 논공행상이 전쟁 때는 은어라 칭송하며 맛있게 먹더니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름도 무르고 푸대접을 하며 젓가락을 대지도 않았다는 풍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조에 이어 인조 역시 그릇된 논공행상으로 피란길에 올라야했고, 이승만 대통령 역시 피란길에 오르는 신세가 됐죠. 도루묵은 깊은 바다 모래바닥에 살아 평소에 잘 잡히지 않다가 알을 낳기 위해 얕은 곳으로 올라오는 겨울이 제철입니다. 올해 도루묵이 풍년이라고 합니다. 혹시 도루묵을 드실 기회가 생기면 선조의 교훈을 떠올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