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동양신화-정재서

<이야기동양신화-중국편> 정재서 지음, 김영사 펴냄.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인 조지프 켐벨이 어느 대담에서 한 말이다. 켐벨은 신화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보았다. 신화는 사회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공적인 꿈이라는 뜻이다. 신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껍거나 어렵거나 고전’인 책을 낭독하는 독서모임을 만 6년째 하고 있다. 여기서 작년에 읽은 책 중 하나가 『이야기 동양신화(중국편)』이다. 그동안 신화 관련서를 몇 권 읽긴 했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동양신화를 다룬 책은 처음이었다. ‘신화, 그리고 상상력’을 평생 키워드이자 화두로 삼고 있는 신화학자로 유명한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가 책을 썼다. 저자는 우리가 선 땅 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세상의 주인으로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과 출구를 신화와 상상력에서 찾고 있다. 신화는 문화의 원형이다. 그래서 동양신화를 읽으면 우리는 동양 문화의 원형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지적 관심을 바탕으로 우리 사유와 삶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양 신화를 흥미로운 서사를 앞세워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반고와 여와의 천지창조부터 황제, 치우, 서왕모 등 신들의 전쟁과 사랑이야기로 넘쳐난다. 거기다 기상천외한 신과 괴물들,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동식물의 이야기가 합세해 종횡무진 하는데 경계가 따로 없다. 큰물이 져 하늘에까지 넘쳐흐르자 곤이 천제의 저절로 불어나는 흙을 훔쳐다 큰물을 막았고, 이일로 천제가 곤을 죽였는데 곤의 배에서 우가 생겨났다. 곤은 물길을 거슬러서 막다가 치수에 실패했고, 우는 물길을 터주어 치수에 성공했다. 자연스러움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는 동양사상의 원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표급 여신으로 서양에 아프로디테(비너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서왕모가 있다. 그런데 서왕모는 인간이라기보다 반은 짐승이고 반은 사람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伴人半獸의 여신이다. 그 형상이 사람 같지만 사실은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하고 있다. 그밖에도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치우, 얼굴 없는 신 제강, 큰 귀를 늘어뜨린 섭이국 사람 등등 황당하면서도 기괴한 캐릭터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읽다보면 동양인의 마음과 행동, 우리 문화 속에 감추어진 우주의 신비와 삶의 지혜에 관한 수수께끼가 풀리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동양신화! 재미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다. 우리가 그동안 그리스로마신화에 너무 익숙해 있는 탓인가.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대표적인 신화집이면서 기서奇書인 『산해경』을 함께 읽다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동진東晋시대의 문인 곽박郭璞이 쓴 주산해경서注山海經敍가 그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을 거쳐서야 이상해지는 것이기에 이상함은 결국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이 이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애초 동양신화를 낯설게 바라보았던 내 시선이 이상했던 것이다.

저자는 중국, 일본, 대만을 수차례 답사하며 모은 600여 컷의 귀중하고 다채로운 자료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동양 신화의 이미지를 더욱 감칠맛 나게 보여준다. 중요한 대목마다 서양 또는 한국 신화와 비교하며 그 상관성과 차이점을 콕콕 집어 설명하는 친절함 역시 책의 가독성을 높인다. 무엇보다 텍스트가 주는 사유의 스펙트럼이 넓다. 뒤죽박죽하게 섞여 있는 가운데서 새로운 균형과 길을 찾기 위해 맞춤한 도구다. 가뜩이나 문화적 편식으로 인해 ‘상상력의 맥도날드 제국’이 출현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하는 시점에서, 상상력의 빈곤을 막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은 이야기에 탐닉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다”(조너선 갓셜)라는 말처럼, 어쩌면 신 역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간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흥미진진한 동양신화를 읽는 재미에 500쪽 넘는 분량이 단숨에 읽힌다. 미래를 여는 이야기의 힘에 탄탄한 이론을 제공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서양신화에 길들여진 편견이 깨지며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 든다. 저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말고도 ‘이야기플랫폼’을 지향하는 <이야기경영연구소>의 대표기획위원을 맡고 있다.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5.3.19.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책 속 밑줄 긋기

지금의 중국 신화 속에는 중국 사람의 신화는 물론 동양 여러 민족의 신화도 담겨 있다. 중국 신화는 사실 동양 신화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11쪽)

인류 최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합한 모습이 수정란의 DNA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묘한 일치이다. 원시인류의 신화적 상상력이 최첨단의 과학과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 (61쪽)

제우스가 최고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과 피나는 투쟁을 벌였듯이 중국의 황제 역시 중앙의 으뜸 신으로 군림하기 위해 막강한 다른 신들과 여러 차례 힘겨운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216쪽)

《산해경》<해내경海內經>에는 이들 나라 이외에 확실히 고대 한국을 지칭하는 ‘조선朝鮮’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하늘이 그 나라 사람들을 길러냈는데 그들은 물가에 살고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420쪽)

명나라 때의 소설 《봉신연의》에서 은나라의 폭군 주왕이 나라를 망치는 데에 적극 협조한 애첩 달기는 구미호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중략) 심지어 요즘 아동들에게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캐릭터‘나인테일’의 원형도 이 구미호이다. (442쪽)

 

박일호 이야기경영연구소 연수교육단장(서평가/이야기경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