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 장석주, 박연준 시인과 함께 찾아간 ‘칠곡 시낭독열차’

칠곡은 ‘시 쓰는 할매들’로 유명하지만 각각 특화된 테마가 있는 19개 인문학 마을의 개성이 멋진 곳이기도 합니다.

70명이 넘는 시낭독열차 탐방객을 맞이해 주신 호스트인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신현우 이장님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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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신유 장군 유적지’입니다. 조선 효종 때 ‘나선정벌’로 유명한 신유 장군의 사당이 있는 곳입니다. 남계리가 고향인 신유 장군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참전한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처럼 신유 장군은 러시아와의 전투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북정일기’라고 합니다. 신유 장군의 사당 외삼문의 현판에도 ‘북정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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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이장님이십니다. 신유 장군의 10세손이시죠. 신유 장군은 나선정벌 이후 한양에서 포도대장을 지냈는데, 당파 싸움에 희생이 돼 파직이 됐다고 합니다. 당시 영의정의 자식 중에 사고뭉치가 있었는데, 그를 잡으러 포졸을 보냈더니 영의정 부인의 치마 폭에 숨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도대장인 신유 장군이 직접 ‘체포’에 나섰고, 치마 폭에 숨은 사고뭉치를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빌미가 돼 “정경부인의 치마를 들췄다”고 반대파에서 반발을 했고, 신유 장군은 지금의 검찰인 의금부에 투옥이 됩니다. 당시 의금부는 징역 3년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신유 장군의 공을 높이 산 효종 임금이 ‘파직’으로 감형해 사흘 만에 풀려나 신유 장군은 고향인 약목 남계리로 낙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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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장군은 전쟁기념관 ‘5월의 호국인물’로 선정이 됐습니다. 그러나 신유 장군의 유품은 교지와 같은 문서 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신현우 이장님은 “6.25 전쟁 이전 까지만 해도 갑옷과 투구, 칼이 남아 있다고 들었는데, 6.25 때 피난을 가면서 종부가 문서는 챙기고, 다른 유품은 독에 넣어 땅에 묻어 두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설명하십니다. 칠곡 지역은 6.25 전쟁 당시 최고의 격전지로 당시 포격과 폭격에 남아난 것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남계리는 인민군 기갑 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특히 폭격의 피해가 심했다고 합니다. 돌아와보니 사당도 남아 있지 않고, 신유 장군을 기리는 비석도 다 깨져 간신히 아랫부분만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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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장군은 낙향하며 딸에게 편지를 썼는데, 낙향하려 하니 타고 갈 말도 없고, 같이 갈 사람도 없으며, 딸린 식구는 많아 굶어 죽게 생겼다고 민망해 했다고 합니다. 신현우 이장님은 “많은 공을 세우고 평생을 공직 생활을 했지만, 포도대장에서 파직 됐다고 먹을 게 없을 정도면 얼마나 청렴하셨겠냐”며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유 장군은 낙향한 후에도 “죄인이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다”고 한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죄인이 어찌 따뜻한 밥을 먹겠느냐”며 밥을 지어도 한 끼가 지나 다 식은 다음에 먹었으며, 매일 아침 북쪽 궁궐을 향해 문안 인사 올리는 걸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낙향한 지 2개월 만인 정월 대보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신현우 이장님은 “신유 장군 자손으로서 평생을 청렴하고 충직하게 사신 할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까 마음을 가다듬고 착실하게 살아오고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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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에는 저마다 특화된 주제를 가진 19개의 인문학 마을이 있습니다. 남계마을은 ‘적정기술’로 특화된 마을입니다. 사진은 연소효율을 극대화한 화덕으로, 여기에 밥을 짓고 국을 끓여 탐방단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현우 이장은 마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잘 것 없는 시골 산골 마을이지만, 우리 마을은 1920년 큰 홍수가 난 뒤에 청년들이 마을을 살리자는 취지로 초롱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적기 시작한 회의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계를 바탕으로 칠곡 인문학마을 사업에 동참하게 됐는데, 마을의 특징을 잡을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적정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산골이니 나무는 많습니다. 화목을 이용한 적정기술을 배우고 연구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30센티미터 장작 한 개비면 닭 다섯 마리를 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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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 후의 산책 시간. 탐방객들이 저마다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무언가를 주워 담고 있습니다. 뭘까요? 잠시 후 알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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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후 저수지 뚝방길을 따라서 다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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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뚝방 위에서 바라본 남계마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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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적정기술을 시연할 차례입니다. 이장님의 발 아래에는 깡통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금 더 큰 페인트 통이고 다른 하나는 분유통입니다. 분유통에 구멍을 송송송 뚫어 페인트 통에 끼워 넣습니다. 사진의 페인트 통은 멀쩡하지만, 페인트 통에도 바람 구멍을 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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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객들이 비닐 봉지에 주워 담아온 것은 솔방울. 솔방울을 분유통 안에 넣고 불을 붙여주면 활활활 타오릅니다. 동시에 바깥 큰 통에서 바람이 들어오면서 화력을 배가 시켜 열 손실을 줄이고 연소율을 높여주는 원리입니다. 솔방울 몇 개 넣었는데, 라면 한 그릇 뚝딱 끓이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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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글바글 끓는 라면이 보이시나요. 야외에서 솔방울로 끓여 먹는 라면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탐방객들을 위해 페인트 통과 양은 냄비를 준비해주신 남계마을 주민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참고로, 분유통과 꽁치나 골뱅이 통조림 깡통을 이용하면 더 작은 사이즈의 미리 화덕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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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이장님 “나무젓가락 열 개로 라면을 끓이는 게 가능하다”면서 시연을 보이고 계십니다. 신유 장군은 나선정벌 당시 러시아 군의 총을 가져와 조선에 소개한 분입니다. 당시 조선 군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이었으나, 러시아 군은 방아쇠를 당기는 총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신기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대를 이어오고 있는 걸까요? ‘적정기술’에 대한 신현우 이장님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신현우 이장님은 기술에 관한 나름의 철학도 탄탄하셨습니다. 이장님은 “기계에 의존하다 보니 휴대전화번호도 기억 못하고 스스로 길도 못 찾는 시대가 되고 있다”고 한탄하시면서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다 해버리면 사람은 일자리를 잃고,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공장도 다 망하게 될 것인데, 우리가 과연 맹목적으로 기계 문명을 따라가야만 하는가”라고 말하십니다.

신 이장님은 더불어 “옛 어른들은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손수 집도 짓고 짚을 꼬아 멍석도 만들고 필요한 건 다 직접 만들어 썼다”면서 “작은 기술이라도 어른들의 기술을 이어 받아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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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이장님이 신유 장군의 ‘상소문’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당시 상소문을 올리게 되면, 중간 관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알아서 해결을 하고, 사안이 중한 것은 임금에게 직접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경우에는 임금이 상소를 확인했다는 의미에서 직인을 찍어 상소자에게 상소문을 다시 돌려줬다고 합니다. 350년 전의 기록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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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장군 유물 보관소 옆에는 ‘타임캡슐’이 묻혀 있습니다. 1996년에 전화카드 같은 생활용품과 당시 마을 생활을 알 수 있는 물품 약간을 넣어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개봉은 무려 300년 후인 2296년입니다. 옛 유물의 귀함을 알고, 미래 300년까지 내다보는 마을 주민들의 높은 식견이 남다릅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운 탐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