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야기경영연구소입니다. 

7월 13일부터 ‘서울미래유산아카데미’가 시작됐습니다. ‘100년 전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제목으로 총 10강의 강좌와 10회의 답사가 진행됩니다. 매주 아카데미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님의 제1강 ‘대한제국과 정동: 제국의 중심에 선 정동과 그 역사환경’ 강연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모퉁이에 전각 하나가 서 있습니다. ‘반 만 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어서일까요? 기천 년은 돼야 유적 대접을 해주는 관념이 있어서인지 구한말에 세워진 이 전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게다가 1960년대 김현옥 서울시장이 세종로 지하도를 만들며 이 전각을 밀어버리려 했다고 하니, 이 전각이 받은 대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전각의 명칭은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입니다. 1902년 고종 황제의 즉위 40년과 51세 생일을 기념해 민간에서 모금을 해 비석을 만들었고, 비석을 두는 전각을 지은 것입니다. 현판에는 간략하게 ‘기념비전’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념비전이 세워진 1902년 전후의 당시 한반도의 시대 상황을 보면 이 유물이 적잖은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념비전을 통해서 대한제국 말기 고종 황제의 꿈과 좌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1897년 한반도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가장 큰 일은 ‘대한제국 선포’일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대내외적으로 독립국임을 선포했습니다. 스스로 황제에 등극한 고종은 요즘 표현을 빌자면 ‘투 트랙’ 전략을 펼칩니다. 당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한은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는 이와 같은 제단이 없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원구단’(‘환구단’이라고도 하는데 ‘원구단’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합니다)이라는 제단을 세웁니다. 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 자리인데, 이곳은 원래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여송 장군 이래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남별궁이 있던 곳입니다. 또한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 앞에는 독립문이 들어섭니다. 

원구단은 전통 방식의 건조물이고 독립문은 완벽하게 서양식입니다. 여기서 고종 황제의 통치 전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유교 사상에 익숙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중화의 중심에 대한제국(고종 황제)이 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된 문명국가임을 과시하겠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당시 정한 국호는 ‘한’(韓) 한 글자였습니다. 진, 한, 당, 송, 명 등 황제국인 중국의 국호는 한 글자였습니다. 반면 ‘조선’과 ‘일본’ 등 변방 국가들의 국호는 두 글자였지요. 다만, 나라이름 앞에 대명, 대청이라 하는 것처럼 크다는 뜻의 ‘대’(大)를 붙여서 ‘대한’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당시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불렸으니 자연스럽게 대한제국이 된 것이지요. 따라서 ‘한국’이라 부른다고 애국심이 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897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다이아몬드 주빌리)이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 특사로 파견됐던 민영환은 기념식에 각국의 특사들이 몰려와 축하를 하는 모습을 고종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고종은 이와 같은 기념식을 통해 대한제국이 문명적인 독립국가임을 전세계 만방에 공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마침 1902년은 고종 황제가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고 51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왕에게 51세는 의미 있는 나이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기로소’라는 일종의 원로회의가 있었는데, 일반 신하는 70세가 넘어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평균 수명이 70세가 안 되던 시절이니, 여기 들어가는 게 상당한 영광이었죠. 왕은 좀 더 이른 나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70세까지 사는 왕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영조가 51세에 들어간 전례가 있기에 고종 황제도 51세에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로소에 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대규모 ‘칭경’(稱慶) 예식을 하기로 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칭경식에 올 외국 열강의 특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갖가지 개발 사업에 착수합니다. 당시 서울에 전차가 놓였는데, 동양에서는 일본 교토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합니다. 온갖 가게들이 길을 파고 들어와 난잡해진 종로통도 이때 깨끗하게 정비합니다. 

“가게에 가서 콩나물 좀 사와”라고 할 때 ‘가게’의 어원을 아시나요? 조선은 한양에 수도를 정하면서 종각을 중심으로 동대문까지 종로라는 큰 길을 만들었고, 여기에 국가가 공인한 시장이 들어섭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권이 발달하고 공인된 시장 외에도 길가에는 조그만 상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섭니다. 보통 가건물을 지어 놓고 장사를 했습니다. 이를 ‘가가’(假家)라고 했는데, ‘가가’가 ‘가게’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고종은 거리 정비를 하면서 종로와 남대문로 일대의 ‘가가’들을 철거해, 대동미와 대동포를 수납하던 선혜청 자리에 가가들의 새 장터를 마련해줍니다. 이 장터가 오늘날 남대문시장입니다.

고종 황제는 또 머물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거대한 서양식 석조 건물을 짓습니다. 종로변에는 서양식 공원인 탑골공원도 만듭니다. 시간도 서양식으로 바꿉니다.

보통 시간을 읽을 때 어떻게 읽으시나요? ‘5시 50분’을 말할 때 “다섯 시 오십 분”이라고 합니다. 왜 “오시 오십 분”이라고 읽지 않을까요? 서양식 시간을 들여오기 전에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를 시간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오 시’라고 하면 서양식의 5시인지, 기존의 ‘오(午) 시’(오전 11시~오후 1시)인지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시는 서수로 읽고 분은 기수로 읽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공적으로는 서양식 24시간, 양력을 쓰면서도 사적으로는 12시간, 음력을 쓰는 두 시간 체제가 공존하게 됩니다.

고종 황제의 도심 재정비 사업이 엉터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1894년 서울을 방문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혹평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1896년 다시 서울에 왔을 때 “동양에서 가장 깨끗하고 문명화된 도시로 바뀌고 있다”고 극찬을 했다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는 칭경식을 제대로 열지 못했습니다. 1902년, 함경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콜레라가 무섭게 확산하고 있는데 외국의 특사들을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일 수는 없었겠지요. 1903년 4월로 연기했으나 영친왕의 두창으로 9월로 다시 연기되고 그나마 러일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취소되고 맙니다. 결국 고종이 바라던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같은 칭경식은 열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대외 만방에 ‘문명화된’ 대한제국을 과시하고 싶었던 고종이었지만 그 꿈은 못 치른 칭경식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꿈이 광화문 한 귀퉁이에 ‘기념비전’으로, 원구단 근처에 ‘세 개의 돌북’(石鼓)으로, 덕수궁 안의 석조 건축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글을 보신 뒤 광화문과 덕수궁, 정동, 종로에 나가신다면 무심히 지나쳤던 유산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당시 긴박했던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들을 살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