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야기경영연구소입니다. 이번에는 서울미래유산아카데미 제2강 권기봉 작가의 ‘상처로 남은 일제의 기억, 그 기억의 현재’ 강의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도 우리가 흔하게 접하지만 그 기원과 유래를 몰랐던 역사적 배경을 많이 알 수 있었습니다. 숭례문(남대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아마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1호’라는 번호로 부여된 상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여기에도 일제 강점기의 아픈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을 통치하면서 문화재에 관리번호를 매겨 관리했는데, 숭례문을 1호로 지정한 것에 대해 “임진왜란 당시 왜장이 한양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당시 일본은 정유재란 당시 축조된 경남 지방의 ‘왜성’ 등 일본과 관련된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했었습니다. 

이렇게 번호를 매기는 것도 문제로 지적됩니다. 문화재에 ‘서열’을 부여되는 효과가 발생되는 것은 물론, 상위권 번호 이외의 문화재들을 소외시키기 까지 합니다. 이를테면 ‘보물 1호’를 아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입니다. 그런데 ‘보물 2호’는 무엇인지 아시나요? 드물 것입니다. 보신각 종입니다. 매년 1월 1일 0시 새해를 밝히는 제야의 종이 타종되는 그 종 말입니다.(사실 보신각 종은 보신각에 있지 않습니다. 균열이 생겨 타종에 부적합해지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고, 보신각에 있는 종은 1980년대 새로 만든 종입니다. ‘보물 2호’를 보기 위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신각 종 타종 행사에도 일제 강점기에 얽힌 역사적 맥락이 숨겨져 있습니다. 권기봉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재야의 종 타종 행사의 유래는 1920년대 경성중앙방송입니다. 지금도 서울 중구 정동의 덕수초등학교 근처에 첫 방송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27년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경성중앙방송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뒤 방송 관계자들은 1928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당시 방송은 낮 12시에 시작이 됐는데 새해 첫 방송 시작과 함께 꾀꼬리 울음 소리를 들려주려 한 겁니다. 인근 농가에서 꾀꼬리를 사다 보자기를 씌워 두고 낮 12시가 되자 보자기를 벗깁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꾀꼬리는 울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나운서가 뒤늦게 사과 멘트를 하면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이 이벤트는 1년 뒤 다시 시도됩니다. 그런데 꾀꼬리를 믿을 수 없었던 방송사는 꾀꼬리 대신 인근 신사에서 종을 빌려다 종을 치는 것으로 새해 첫 방송 이벤트를 대신합니다. 나중에는 일본 도쿄 아사쿠사 관음당의 새해 타종 소리까지 이원생중계하면서 대대적인 연례 새해맞이 행사가 됩니다. ‘대동아 전쟁’을 펼치던 일제는 당시 이를 ‘흥아(興亞)의 소리’라 하여 제국주의 선전의 수단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게 해방 후 중단됐다가 경성중앙방송을 그대로 이어 받은 KBS가 1953년 다시 실시합니다. 이후 우리가 아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됐죠.

보신각 종도 ‘종’인 만큼 종소리의 기능이 있었습니다. 한양 도성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4대문과 4소문으로 출입이 이뤄졌습니다. 보신각 종은 새벽 4시(파루), 밤 10시(인정), 각각 33번과 28번을 쳐서 성문을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었습니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섣달 그믐 밤이나 정월 초하루에 종을 쳤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불가에서는 종을 섣달 그믐 밤 107번을 치고 108번 째를 자정에 쳐서 새해를 알렸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조선은 숭유배불 정책을 폈기에 수도 도성의 출입을 관장하는 국가의 중요한 기능을 하던 보신각 종으로 불교 의식을 했을리 없습니다. 권기봉 작가는 “그렇다고 제야의 종소리 타종 행사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행사에 이런 역사적 맥락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제 강점기가 길었던 만큼 근대 역사 유적 중에는 아픔을 지닌 곳들이 많습니다. 독립문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름 ‘독립문’이라는 상징성 덕에 일각의 ‘성역화’ 주장도 있었지만, 사실 독립문은 사대주의 조선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었을 뿐입니다. 정작 일제로부터의 독립의 성격은 약했습니다. 덕분에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경복궁을 박람회장으로, 원구단을 호텔로 훼손했던 일제에게 독립문은 불온한 대한제국의 유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독립문을 유지 보수했기에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는 일제 유물을 청산해왔습니다. ‘중앙청’으로 쓰이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는데, 중앙의 첨탑은 독립기념관 구석 뜰에 지하에 5미터 가량 묻혀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제 잔재의 청산과 극복”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권기봉 작가는 묻습니다. “이런 주술적 행위로 일제 잔재가 청산이 된다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일제 잔재는 건물을 철거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 사법, 행정, 교육 등 일제의 사회 시스템이 물과 공기처럼 우리 사회에 녹아 있는 흔적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과거 청산 방식은 건물 허물고 이름을 바꾸는 데 머물러 있습니다.”

1908년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는 “감옥 담장이 무너질 정도”로 많은 독립투사를 투옥하고 고문하던 곳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후에도 남아 독립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투옥됐고, 1987년 이전될 때까지 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투옥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대문형무소는 전반기 40년의 역사만 기리며 ‘반쪽짜리’ 역사 유적이 돼 있습니다. ‘정치’에 역사가 가려져 있는 경우입니다.

권기봉 작가는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온전하게 들여다 보지 않고 정치적 윤색과 취사선택에 의한 망각의 그늘에 가려진 것이 우리의 근현대”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일제 강점기나 근현대의 아픈 상처들이 없애고 지우고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맥락없는 전통을 낳고 왜곡된 기억만 남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역사적 맥락을 알게 됐으니 내년 제야의 종소리는 이전과는 달리 들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