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야기경영연구소입니다. 이번에 전해드릴 서울미래유산아카데미 이야기는 서울학연구소 김영수 교수의 ‘한양도성’에 관한 제3강 강의입니다.

남산이나 인왕산에 오르면 성곽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구간에는 최근에 쌓인 매끈한 성곽도 있지만,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오래된 성곽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성곽들은 언제 처음 쌓은 걸까요? 태조 5년. 그러니까 1396년에 처음 축조됐습니다. 무려 622년이나 된 것입니다.

‘에이. 그럼 뭘해. 지금은 다 무너지고 조금 밖에 안 남았는데.’라고 말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양도성의 성곽 길이는 18.6킬로미터에 달하고, 그 중 13.1킬로미터가 남아 있습니다. 전체 성곽의 70퍼센트 이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전체 길이 ‘18.6킬로미터’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평 도상의 길이가 18.6킬로미터인데,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성곽의 특성상 실제 길이는 19.1킬로미터 가량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도의 기능을 하고 있는 도시에 이렇게 긴 성곽이 남아 있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왕이 된지 3년째인 1394년 수도 이전지로 한양을 정합니다. 궁궐과 종묘를 짓고 종로 등 도로를 닦은 뒤 1396년 성을 쌓습니다. 아시겠지만 한양은 4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타락산), 남쪽의 남산(목멱산)입니다. 이와 같은 지형을 이용해 성곽을 두르는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18킬로미터가 넘는 구간을 단 98일만에 쌓은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시 도성을 쌓을 때 백악산 정점을 기준으로 한 구간을 600척(약 180미터) 씩 97개 구간으로 나눠 동시다발적으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1차 공사는 1396년 1~2월 49일 동안 진행됐고, 2차 공사는 8~9월 역시 49일 동안 진행됐습니다. 산지의 능선 등 험난한 구간은 석성으로 쌓되,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습니다. 1차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11만8070명이었고, 2차 공사에는 7만9400명이 동원됐습니다. 주목할 점은, 공사를 할 때 각 구간마다 공사를 맡은 지역과 책임자 이름을 새기고 기록해둬 성곽이 무너지거나 보수가 필요할 때 책임자를 다시 불러들여 보수케 했습니다. 지금도 일부 성벽 돌에는 구간 이름과 책임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책임 시공’이죠. 성곽에 하자가 생기면 계속 불려다녀야 하니, 성심껏 시공을 하지 않았을까요? 시공부터 사후 관리까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췄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성 구간은 장마철에 무너져 내리는 등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평지의 토성 구간까지 모두 석성으로 개축한 왕이 있는데, 이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1422년 세종은 각 구간의 책임 시공자들을 불러들여 대대적인 개축을 진행합니다. 세종 때 전국 8도에서 동원된 인원만 32만2천여 명입니다.

이렇게 쌓은 도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방어’라는 성벽의 제 기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성곽을 이용해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벌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이 있었지만, 당시 왕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일찍 피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숙종 때는 ‘도성수비론’이 대두돼 도성을 전면 보수했고, 영조는 ‘수성윤음(守城綸音)’,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반포해 다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동시에 도성 방어와 관리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후 고종 때까지 도성은 잘 유지관리 돼 왔습니다.

한양도성의 운명은 조선의 운명과 함께 훼철의 수난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고종은 서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에 전철을 깔면서도 전차가 문 안으로 통과하게 하는 등 성문과 성곽을 훼손하지 않으려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다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1907년 일본의 왕세자 방문 때였습니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내각령 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숭례문의 서쪽 성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왕세자가 서울에 입성할 때 조선인들이 다니는 숭례문으로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숭례문 앞에는 일본인거류민단이 만든 봉영문, 숭례문 안쪽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세운 봉영문이 세워졌고, 성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새 길을 닦아 일본 왕세자를 맞이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도로가 새로 생기고 확장되면서 성곽과 문들이 수난을 겪습니다. 1915년 돈의문(서대문)과 그 주변의 성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회현동 자락의 성벽을 허물었습니다. 1926년에는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짓는다면서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의 성벽을 헐었고, 1938년에는 창경궁에서 돈암동으로 나는 길을 만들며 혜화문 석축을 헐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해방 후에도 성곽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1961년 남산 자유센터를 공사하면서 그 일대 성곽을 없애버렸고, 광희문도 도로 확장 과정에서 남쪽으로 15미터 옮겼습니다. 그러다 1968년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국방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한양도성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연구와 보전 작업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DDP를 짓는 과정에서 땅을 파다 물길이 흘러나가게 하는 구조물인 ‘이간수문’을 발견했습니다. 김영수 교수는 “지금도 성곽이 있던 자리의 땅을 파보면 성곽 구조물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성곽이 사라진 자리에도 성곽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지금은 새 건물을 건축할 때 땅을 파서 기초를 다지지만, 예전에는 흙으로 덮은 뒤 그 위에 새 구조물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일부 구간에서는 성곽 돌을 빼다 자기 담장에 쓴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급팽창했고, 새로운 길과 주거지가 형성되며 한양도성은 개발의 장애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중요한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화마을, 장수마을 등의 인기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곽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경관 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이 단순한 옛 왕조의 유물이 아니라, 현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화 자산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