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유산아카데미 1차답사(2) - 대관정, 구 러시아 공사관 터

작성자
김칠환
작성일
2016-10-16 00:01
조회
8886
서울미래유산아카데미답사 1차(2) : 대관정(大觀亭) 터, 정동길, 구 러시아 공사관 터

 

대관정 터

환구단에서 웨스턴 조선호텔 정문을 지나 도로를 건너면 바로 대한제국 영빈관이었던 대관정(大觀亭) 터가 나타난다.

한국독립운동 유공자로 선교사 헐버트가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23세의 나이로 왕립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내한하여 교육 및 외교 자문관으로 고종황제를 보좌한다. 이후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 이준 열사가 참석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등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가 이곳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유리창을 사용한 건물을 짓는다(1876~7년 추정).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보니 맞은편에 이 건물이 보였다. 당시는 궁궐에서 밖으로 보이는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고종은 헐버트에게 이 건물을 팔도록 하였고, 이후 대한제국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1899년 6월 8일부터 19일까지 당시 독일 빌헤름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황태자가 방한하여 여기서 체류하는데 대한제국 반포이후 최초로 방한한 국빈이었다는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곳 또한 일제가 그냥 둘리가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빌미로 황실의 영빈관을 무단으로 점유하여 자신들의 사령부로 사용한다. 이후 소유권이 일본 회사를 거쳐 경성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모기업에서 구입하여 호텔을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한편 이곳은 을사늑약체결 당시 일제가 대신들을 겁박했던 곳으로 을사늑약체결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장소를 아는지 모르는지 호텔 건립을 위해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있는 대관정 터는 출입금지 줄이 쳐져 있고, 그 안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만 남아 답사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구 러시아 공사관 터

정동길은 구 한말 역사를 지켜본 곳이다.  근처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이 자리를 잡았고 자연스레 서양인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그 중에도 러시아공사관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어느 날 깊은 밤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거처를 옮긴 것이라지만 피신한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일국의 국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니 국가의 위신이나 자주성이 크게 떨어졌음을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삼림 채벌권, 광산 채굴권 등을 얻으며 이권을 챙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지낸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고,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고종황제가 경운궁에서 거주한 것이 혹자는 비상시 외국 공사관으로 쉽게 피신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고도 하지만, 실제는 열국을 주변에 거느리는 모양새로 대한제국의 위엄을 알리고자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궁궐 주변에 2층 이상을 건축하지 말도록 각국 공사에 공문을 보내고 덕수궁 안에 석조전을 건축하였다.

이런 사연을 들으며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으나 겨우 남아있는 러시아 공사관 터의 전망대를 쳐다보니 꽤 거만하게 서 있는 형국으로 느껴졌다..

문화재청에서는 아관파천의 길인 덕수궁 서북쪽에서 미 대사관저를 거쳐 러시아 공사관 터까지를 ‘고종의 길’로 복원한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다. 어쩌면 일국에 치욕의 역사요, 외교의 무지와 무능의 역사가 만들어진 곳이니 복원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왕에 복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찾아서 다시는 그와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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