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시인 꿈꾸며 놀던 고향 범어천변에 시비와 함께 오니 큰 기쁨”

작성자
leesuin
작성일
2016-04-25 10:13
조회
1021
대구 생가 근처에 ‘정호승 시비’ 제막…대표작 ‘수선화에게’ 새겨

“초중고 12년을 범어천변을 지나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 놀이터였죠. 이 길을 다니면서 자연을 배우고 인간을 만났으며 시인의 꿈을 꾸었습니다. 한마디로, 범어천은 제 문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예수’ ‘슬픔이 기쁨에게’의 시인 정호승(66)의 또 다른 대표작 ‘수선화에게’ 시비가 그의 고향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천변에 세워졌다. 23일 오후 열린 시비 제막식에서 정 시인은 “범어천변을 거닐며 시인을 꿈꾸던 소년이 이렇게 노년에 다시 범어천을 찾게 된 것은 큰 기쁨”이라고 밝혔다. 이진훈 수성구청장, 장호병 대구문인협회장, 김부겸 20대 국회의원 당선인, 이야기경영연구소 주최로 답사에 나선 독자 등 100여명이 함께 축하했다. 시인의 생가터에서 멀지 않은 중앙고 맞은 편이기도 한 시비의 주변에는 수선화도 심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로 시작하는 시 ‘수선화에게’에 대해 시인은 “특별히 좋아하는 시는 아니었는데, 시를 읽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내 대표시처럼 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시는 50대 초에 쓴 겁니다. 그때 만났던 친구가 외롭다고 하길래,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던 말을 시로 발전시킨 것이죠. 제목에 쓴 수선화의 색깔이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의 색깔이에요. 한번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가 이 시를 읽고 다시 살 힘을 얻었다며, 나를 꼭 안으며 감사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라는 걸요. 이 시비 앞을 걷다가 우연히 발길을 멈추고 시를 읽고는 가슴에 담아 가는 사람이 이 시의 진짜 주인인 거죠.”

그는 이날 범어도서관에서는 ‘내 문학의 고향 범어천’ 제목으로 특강도 했다. “시를 처음 쓴 게 계성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국어 담당 김진태 선생님께서 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가르치시다가 시를 한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어요. 그때 범어천 자갈밭을 생각하며 ‘자갈밭에서’를 썼는데, 선생님께서 뜻밖에도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호승이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겠구나’라고요. 선생님의 그 말씀이 지금의 나를 만든 셈입니다.”
대구/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