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조용호의 나마스테!] “일상의 언어로 현실의 고통 보듬는 게 내 시의 본질이다”

작성자
leesuin
작성일
2016-05-13 10:01
조회
1076
기사 게시 날짜 2016.05.13

영원한 서정시인 정호승

“인생은 여행이잖아요. 우리에게도 목적지가 있지 않나요. 그곳까지 가는 여정에서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사람의 마음속을 여행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을 시작했고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정호승(66) 시인이 이 말을 한 것은 서울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추풍령과 영동 사이 황간 역을 지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야기경영연구소’에서 독자들을 모집해 1박2일 일정으로 시인의 고향에 함께 가는 길이었다. 시인이 초등학교를 거쳐 중고등학교시절까지 보낸 대구 범어천변을 찾아가 수성구에서 주관하는 그의 시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생가 자리를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지난달 23일에 떠났으니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그날 8호차 앞자리 창가에 홀로 앉아 가던 그의 옆자리로 가 시인의 마음속을 여행한 기억은 생생하다.

독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만난 정호승 시인. 그는 “밥을 지을 때 반드시 물을 부어야 하듯 시를 쓸 때는 서정이라는 물을 부어야 한다”면서 “서정은 낡은 게 아니라 시의 소중한 본질”이라고 말했다.



“어제는 어머니가 기운이 좋으셔서 범어천 다녀온다고 말씀드렸더니, 옛날에 사는 게 힘들고 슬픔이 많았기 때문에 돌다리 건널 때 그 냇물에 비치는 달을 보고 오면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시를 썼다고 하시더군요. 시는 사람의 슬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사는 게 기쁘고 즐거운 데서 오는 건 아니라고 덧붙이시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94세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저도 항상 인간의 비극성이 시의 발화점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정호승은 간명한 시어와 인상적인 이미지로 소월과 미당을 거쳐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는 서정시인으로 호가 높다. 요즘 독자들은 그의 이름에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같은 시집들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어두운 시절에 출간된 그의 첫 시집은 ‘슬픔이 기쁨에게’(1979, 창작과비평사)를 표제로 달고 나왔다. 당시 그에게 슬픔은 고통의 다른 이름이었다. 암울한 시대분위기가 추동한 정서였겠지만 구순의 모친이 설했다는 ‘슬픔의 시론’을 듣고 보니 기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시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의 슬픔은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를 거쳐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를 내면서 사랑으로 진화했다.

대구시 수성구 범어천변에 세워진 시비 앞에 선 정호승 시인.



“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을 시화할 수 있는지, 그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드는 전환이 이루어졌죠. 예전에는 타자에게서 인간의 고통을 많이 보았는데 나의 고통이 그 사람의 고통이더군요. 경계가 없습니다. 사는 게 고통스러운 건 결국 사랑이 결핍된 데서 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사랑이 결핍돼 있어서 그런 겁니다.”

계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범어천 자갈밭을 표제로 써낸 숙제 시를 보고 김진태 선생님이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한 이래 그는 운명적으로 시인의 길을 달려왔다. 대륜고등학교 시절 각종 백일장 대회를 휩쓸다가 경희대 국문과에 1년간 등록금을 면제받는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장학금을 계속 받기 위해 고시공부하듯 신춘문예에 매달렸지만 최종심에서 연거푸 떨어지다가 자원입대를 했다. 친구들과 치기어린 미당 시 화형식을 벌였던 그에게 군시절은 미당의 시를 꼼꼼하게 필사하며 새롭게 거듭나는 치열한 습작기였다. 제대 말년이던 197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군종병으로 일하던 교회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와 대한일보에서 보낸 ‘축 신춘문예 당선!’ 전보를 전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관문도 통과했다. 숭실고 국어교사로 시작해 잡지사를 전전하다가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1991년 직장을 그만두었다. 결국 소설보다 시가 자신의 체질임을 뒤늦게 간파하고 6년 공백 끝에 낸 시집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였다. 당나라 선승 임제가 제자들에게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고 했다는 글귀를 접하고 언젠가 시집을 내면 꼭 이 대목을 활용하리라 마음먹고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로 시작되는 ‘그리운 부석사’를 썼다.

“젊은 시인들은 내 시가 일상의 쉬운 언어로 씌어져서 낡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어떤 정신으로 그 자리에 씌어지느냐에 따라 새로워집니다. 사랑이란 말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쓰면 죽은 언어가 되고 진정으로 쓰면 살아 있는 언어가 되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일부 젊은 사람들이 쓰는 시는 소통을 포기했다고 생각해요.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납니다. 시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인간으로 치면 눈빛인데 그 눈빛을 보면 다 알잖아요? 일상의 언어로 시의 눈빛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내 소임이라는 생각입니다.”

청년시절 ‘일상의 쉬운 우리말로 현실적인 삶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김명인 김승희 김창완 등과 더불어 ‘반시’ 동인으로 활동했던 그의 시는 일관되게 난해한 관념어를 쓰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어로 감동을 지어왔다. 그날 기차에서 내려 당도한 범어천변 시비 제막식 현장에는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로 이어지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를 이지상이 작곡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가 양희은의 목소리로 내내 흘러다녔다. 이날 제막한 시비에도 음각된 시편이다. 그는 아이를 잃고 살아갈 희망을 잃었는데 이 시를 읽고 다시 희망을 찾았다면서 시인을 꼭 안고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는 부부 이야기를 전하면서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정호승의 시는 이동원이 부른 ‘이별의 노래’를 필두로 ‘맹인부부가수’ ‘부치지 않은 편지’ ‘우리가 어느 별에서’ ‘눈물꽃’ 등 60여편이 노래로 만들어졌다. 안치환과 함께 100여회 이상 공연 무대에도 서온 그는 “노래를 위해 시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면서 “시가 노래가 될 때는 시의 영역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노래를 만드는 이가 조금 고쳐 다른 옷을 입히는 걸 방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물이라는 건 다 똑같지만 깊이는 다르다”면서 “사람도 깊어져야 하고 내 시도 마찬가지”라고 특유의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대구에서 올라와 엊그제 인사동에서 다시 만난 저녁, 그는 자신의 시를 거의 외우지 못하지만 ‘산산조각’이라는 시의 마지막 4행은 늘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했다. 모든 부서진 마음을 다독일 듯한 그 시는 이렇게 흐른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