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유산아카데미 1차 답사(1) : 군기시~환구단

작성자
김칠환
작성일
2016-10-15 23:39
조회
8371
미래유산답사 : 군기시(軍器寺)~환구단

서울미래유산답사 프로그램을 참여하기에 앞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으로,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이라고 해당 사이트는 소개하고 있다. 미래유산의 발굴 및 예비후보 제안은 미래유산 홈페이지나 SNS, 커뮤니티맵 등을 통한 상시 시민제안이 가능하다고 한다.

군기시(軍器寺)

서울시청 시민청으로 들어가면 건물 지하의 ‘군기시 유적’으로 연결된다. ‘군기시’(軍器寺)는 조선시대 무기를 제조하던 관청으로, 태조원년(1392) 설치되었다가 고종 21년(1884)에 폐지되었으나 당시 근무인원이 6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었다고 한다.

2008년 3월 서울시청 신청사가 착공되어 부지조성 과정에 조선시대로 보이는 유물과 유구가 무더기로 발굴되어 조사를 벌인 결과 이곳은 근대와 조선시대에 각각 조성된 호안 석축, 건물 등의 유구와 각종 조선시대의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이후 여러 조사 내용을 종합한 결과 지금의 서울시청 신청사 자리는 군기시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어 그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불과 130여 년 전까지 넓게 자리 잡았을 관청 터가,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고 있다가 발굴을 통해 흔적을 찾았다는 생각을 하니 답사 첫 날부터 무언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군기시 부근은 청계천 지류인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하천을 건너던 교량은 군기시교 혹은 군기시전교라고 하였다. 또한 군기시가 무기를 제조하는 관청이었기에 달리 무교(武橋)라고도 불렸다. 오늘날 무교동(武橋洞)이라는 지명은 이 다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조선경성부 건물이 세워졌다. 일제는 덕수궁을 허물려고 하다가 논란이 일자 맞은편에 덕수궁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조선경성부 건물을 크게 지었다고 한다.

환구단(圓丘壇)

군기시에서 나오면 시청 맞은편으로 환구단(圓丘壇, 사적 제157호) 정문이 보인다. 길을 건너 환구단 후문으로 들어갔다. 표지판은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환구단(圜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皇壇) 또는 원구단(圓丘壇), 원단(圓壇)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는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담별궁이 있었는데,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8각전 건물 황궁우(皇穹宇), 돌로 만든 북(石鼓)과 문 등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는 황궁우, 석고, 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황제가 머물던 황궁(덕수궁)과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당일 동행하신 역사학자 전용우 님의 설명을 곁들인다. 황제 또는 천자는 하늘에 있는 신의 뜻을 알리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황제만 가능했다. 중국 베이징의 원형 천단(天壇)이 그 예다. 또한 황제는 하늘의 시간을 알리는 사람이다. 따라서 예전에는 매년 동지사(冬至使) 편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는 책력을 받아왔다. 즉 황제 이외에는 시간을 관리하지 못한 것이다.

천단은 원형이 기본이다. 팔각형은 하늘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땅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건물과 기단 등이 팔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과 땅 중간에 신성한 것을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에 3층 팔각형의 황궁우(皇穹宇)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만, 황궁우는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지금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팔각정이지만 예전엔 아무나 지을 수 없었기에 환구단과 이후 탑골공원에 팔각정이 들어섰다.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것도 이런 연유가 있다;.

환구단을 조성한 고종은 1897년 10월 17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원래 이곳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집이었다. 따라서 작은 공주골로 불리던 이곳이 한자로 소공주동이 되었고 이를 줄여서 소공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오늘날 소공동(小公洞)이 된 유래다.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에 주둔한 이래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도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따라서 고종황제가 이곳에 원형의 환구단을 세운 것은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독립적인 시간 관리를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을 자주성을 알리는 환구단을 일제가 그냥 둘리가 없었다. 1914년 이곳을 헐어버리고 서울역과 떨어진 곳임에도 철도호텔(조선호텔)을 세운다. 철도호텔은 1935년 반도호텔이 건립될 때 까지 서울 최고의 호텔이었다. 이후 1968년 그 자리에 새로 호텔이 세워지니 현재의 서울 웨스턴 조선호텔이다. 그러니 환구단의 원래 위치는 현재 호텔자리가 된다.

환구단 한 쪽에 석고(石鼓)가 있다, 이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만든 조형물이다. 중국인 석공들을 불러 만든 석고는 3개의 돌 북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조선 말기 최고의 조각품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환구단의 역사를 새롭게 알려준 답사였으며, 당일의 답사는 대관정터 – 대한문 – 정동교회 – 구 러시아 공사관 자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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